직장인이라면 대학 4학년 시절 약간은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입사지원서를 써본 경험을 최소한 한두번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입사지원서와 함께 제출해야 하는 이력서를 쓰다 보면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스템통합(SI)업체인 삼성 에스디에스 제조/서비스개발실의 김은갑(39) 부장은 그런 이력서를 1년에 꼬박
2번씩 새로 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력서의 항목을 반년마다 하나씩 늘려가는 것이다. 더 나은 자리나 직장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92년에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현지에서 마나 친하게 지내고 있던 한
선배가 `인생이란 자신의 이력서를 한줄한줄 채워나가는 것이고, 결국 그 이력서가 자신의 삶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것 아니겠냐'고 말하더군요.
그 말이 저에게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6개월에 한번씩 이력서를 쓰기로 작정했죠. 그러면서 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부족한 부분을
찾고, 나머지 6개월에 대한 비전과 방향을 잡으며 살아가자고 생각했죠.”
이력서에 채워놓을 내용으로 논문을 택한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동안 빠짐없이 6개월에 한번꼴로 새로운 논문을 써오고 있다.
“`SCI'(사이언스 사이테이션 인덱스)라는
저널콜렉션이 있습니다. 국내 대학에서도 교수들의 수행능력평가를 할 때 이 리스트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올렸는지 봅니다. 그 리스트에 오른 논문이
6편이고, 현재 심사중인 것이 10편 정도입니다.”
그가 쓰는 논문은 두가지 분야다. 생산라인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과 물류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IT(정보기술)를 바탕으로 한다.
10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올해 그는 결실을 거뒀다. 미국의 이라는
전문잡지에 실린 그의 논문이 2000~2001년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이 잡지는 물류분야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전문지다.
회사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어떻게 시간을 내는지 궁금했다.
“주로 주말에 씁니다. 평일에도 약속이 없으면
스포츠센터에서 1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집에서 논문 준비를 하고요.” 그가 논문에 투입하는 시간은 주 20시간 정도다.
`서울대
산업공학과 학·석사(83학번),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원,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박사, 캐나다 토론토대 경영대학원 연구원 등을 거치며
학교와 연구소, 그리고 기업을 죄다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끊임없는 `논문 이력'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고 한다.
자기
관리는 어떻게 할까?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통제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집사람과 자식에게 자기관리가 철저한 남편이고 아빠란 소리를 듣기
원했고. 삶에 있어 동기부여 혹은 꿈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말씀드린 대로 6개월에 한번 이력서를 쓰는 것이 저를 담금질하는 과정이고, 그
이력서가 제가 꿈꾸는 희망에 대한 마스터플랜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직장인으로서 생활이 지나치게 단조롭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물어봤다. “자기관리에 너무 철저하면 사회성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십니다. 주말에도 가족을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하는 가장을 이해해준 가족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렇게 10년간 써온 이력서가 이제 A4 용지 5장 분량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학력란을 뺀 나머지는 모두 그의 논문
목록이다.
“인생도 흘러가는 것이고, 물도 흘러가는 겁니다. 둘다 정체되면 곧바로 썩기 시작합니다. 안정된 삶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컴퓨터용어로 말하면 바이러스라고 봅니다. 어차피 인생은 유한한 겁니다. 거기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거죠.”